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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역사저널 그날

광해군 이야기 (영창대군 죽음 이유,인목대비 폐위 과정 등)

by 짱신나^^ 2021.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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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조선 14대왕 선조(광해군 아버지)는 부인이 8명으로 왕비가 2명 후궁이 6명이었는데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광해군의 경우는 적자가 아닌 서자 심지어 장자도 아닌 둘째였는데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의 행실은 포악한 성격으로 행실이 안 좋았는데 광해군은 그에 비해 평판이 좋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선조 광해군 가계도
선조 광해군 가계도

 

어린 어머니 인목왕후 

인목왕후는 의인왕후가 죽고 나서 후처(=계비)로 들어온다. 인목왕후와 결혼할때 선조의 나이가 51세였고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였다.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엄마였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병적으로 유교적 가치에 따라 여성의 순결을 강조했던 나라이다. 이에 처녀하고만 결혼해야 하니까 왕은 50대가 되었는데 10대 중후반에 여성과 결혼이 가능했고 이것은 일반 양반가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영창대군 탄생 

인목왕후가 결혼하고 나서 일년 뒤에 정명공주가 태어나고 2년 뒤에 영창대군(적장자)가 태어난다. 이때 선조의 나이가 54세였다. (그때 어의가 허준이다.) 영창대군이 탄생한 당시 광해군은 이미 세자로 책봉이 되어 있었다.  1592년 18세에 세자로 책봉이 된 광해군이 세자라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알고 있었고 명나라에서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광해군의 약점 

당시 왕의 즉위나 책봉 시 조선은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었다. 그러므로 명 황제의 세자 책봉 승인을 거절당한 광해의 지위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또한 선조도 광해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광해군 세자 책봉 후 임진왜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북진한 일본에 의해 조선은 위기를 맞는다. 피난을 결심한 선조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후궁 소생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광해군의 나이 18세였다. 이후 세자 광해군은 왕을 대신해 분조(조정을 나눈다: 국가비상사태에서 임시로 철치한 조정)  이끌고 전쟁 속 전국을 돌며 민심 수습에 나섰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성공적인 군주 활동을 끝내고 아버지 앞에 선 광해군이지만 그의 앞에는 더욱 험난한 세자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력과 돈은 부자지간에도 나눌수가 없다고 했던가? 선조는 본능적으로 아들을 왕위를 노리는 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당시 선조가 가장 견제하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다.   

 

 

선조의 양위 소동 

선조는 양위(왕위를 물려줌) 소동을 임진왜란 중 18번 포함 총 21차례였다. 이상한 것은 광해군이 외지에 있거나 아플 때 즉 실제로 양위할 수 없을 때만 양위소동이 일어났기에 선조는 양위 의사가 전혀 없음을 파악했고 실제로 유성룡과 정철이 양위 찬성을 얘기했다가 정철은 유배를 가게 된다.

 

선조는 재위기간 중 총 21번의 양위소동 중 임진왜란 중 18번
선조는 재위기간 중 총 21번의 양위소동 중 임진왜란 중 18번

 

광해군은 의인왕후 승하 1년이 지났는데 새 왕비 간택을 종용하며 1602년 인목왕후 김씨를 계비로 정하게 된다.  그리고 인목대비는 결혼 4년만에 영창대군을 생산한다. 임진왜란 이후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편애하면서 광해군을 구박하니 신하들도 선조의 의중을 알게 되고 영창대군의 지지세력이 생겨나게 된다.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

그러다 선조41년 찹쌀밥을 먹다가 위독해져 갑자기 선조는 승하하게 된다. 이에 인목대비는 아직 3살인 아들을 보호하는 길이 차기 왕인 광해군과의 타협이라고 판단했고 바로 광해군에게 옥새를 내린다. 그렇게 광해군은 1608년 조선 제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17년의 세자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보위에 오른 것이다.

 

 

광해군의 인목대비를 향한 복수

 

칠서지옥

세자 생활 내내 불안과 울분에 차 있었던 광해군은 결국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향해 복수를 시작한다.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을 잡았는데 7명 모두 서자출신이었다. 이것을 칠서지옥 이라하는데 취조 과정에서 놀라운 음모가 드러난다. 김제남을 중심으로 돈을 모아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것이다. 김제남은 인목대비의 아버지였다. 이것이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난 계축옥사이다.  

 

 

영창대군 위리안치

이 사건이 밝혀진 것은 7명 중 한명인 박응서라는 사람의 고문끝 진술에서 나온 것이다. 조작이라는 심증은 있으나 진실은 알수 없는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김제남을 비롯해 인목대비의 가족 모두 역모죄로 처형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위리안치시킨다.  (당시 영창대군은 8살이었다.) 적자인 영창대군은 사람만 있어도 결국 훗날 왕조의 화근이 될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영창대군 증살기록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영창대군 증살기록

 

영창대군을 왜 증살했을까? 

영창대군이 위리안치되고 1년후 증살시켰다. 그러나 증살방법을 광해군이 직접 지시했다는 근거는 없다. 이것은 전인살해 방법으로 역모에 연루되 왕족을 처형하지 않고 위리안치형에 처한 후 해당 지역 관리가 적당한 때에 살해하도록 묵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영창대군에게 음식도 잘 주고 호의적이였던 ‘기협’이라는 강화부사를 교체해버린다. 이에 새로 부임한 부사는 자신의 임무를 알고 시행한 것이다.  

 

전인살해 란
전인살해 방법으로 증살당한 영창대군
전인살해 의미
*인명안전기준에 따르면 실내온도 60도 이상 장시간 노출될 경우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끼칠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름철 밀폐된 차량에서 발생하는 사고와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계축옥사 

김제남의 역모주도, 영창대군 왕 추존, 인목대비의 저주와 내용으로 김제남과 영창대군은 이에 대한 처벌을 마쳤으나 유교 국가인 인목대비에 대해서는 어머니를 처벌할수 없음에 인목대비를 폐위시킨다.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한 대신들은 모두 유배를 보내고 인목대비는 서궁(지금의 덕수궁 서거당)에 유패시킨다.

 

인목대비가 폐위되었던 덕수궁 서거당 모습
인목대비가 폐위되었던 덕수궁 서거당 모습
계축일기 : 조선 광해군 때 궁녀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소설
계축일기 : 조선 광해군 때 궁녀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소설로 인목대비의 유폐 생활을 일기체로 적은 글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조선 역사상 두번째 반정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광해군의 조카/선조의 첫번째 손자)을 즉위시킨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어린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시킨 패륜을 저지른 광해군의 15년 권좌를 축출하게 된다. 광해군은 말년에 측근 세력만을 믿고 있었고 광해군의 방심과 매수된 측근에 의해 정변이 성공하게 된다.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창덕궁을 지키던 경호 책임자 훈련대장까지 반정군에 가담하면서 창덕궁을 너무 쉽게 들어간 것이다.   

 

 

광해군과 능양군의 악연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여 유배를 당했다가 자살을 하고 아버지 정원군은 정원군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으로 광해군이 정원군의 집을 몰수해 버렸다. 왕기가 서린 정원군 집터를 허물고 지은 집이 바로 경희궁이다.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뒤바뀐 운명

인조반정은 광해와 인목대비의 운명이 다시 한번 뒤바뀌던 순간이었다. 능양군(인조)이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으로 반정군이 찾아가서 창덕궁으로 행차를 청했는데 대비가 윤허하지 않고 능양군을 경운궁으로 직접오라고 했다. 다음 날 능양군이 서궁에 직접 찾아가 옥새를 전달받았다.

 

 

광해군 폐위 이유

광해군은 반정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숨어있었으나 바로 붙잡혀 덕수궁으로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된다. 그런 광해군을 보고 36가지 죄목을 읊는 인목대비였다. 

 

광해군 죄목
광해군 죄목

 

광해목의 가장 큰 죄목은 명나라를 배신한 것이고 두 번째가 페모살제(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과 형제들을 죽인것)였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사회는 성리학의 명분론이 강조되고 또한 효의 윤리 예가 중시되기 시작한다. 인조반정은 성리학이 더욱 강화되던 핵심적인 사건이었다.

 

 

반정의 이유로 효가 강조된 이유 

광해군이 명나라 배신의 명분으로 폐위되었으나 반정 이후 5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생 9년 후 병자호란과 삼전도 항복으로 반정의 명분이 약해진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인조반정 이후에는 남은 명분인 폐모 문제를 부각시킨 인조의 정권이었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이후의 반정을 일으킨 이유에 명나라 배신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게 되고 더욱 효를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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