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4회 3]
오늘의 탐사지: 강화도 고려궁지
주제: 고려의 강화도 수도천도
출연자: 설민석
고려 강화천도 배경 알아보기
몽골 침략 전 동아시아 정세
100년이 지나 여진이 급성장하면서 금나라를 건국한다.
금나라는 거란족을 없애고 거란족은 나라를 잃고 흩어지게 되고
여진족이 다시 송나라도 멸망시킨다.
남송만이 남아 있고 실질적으로 금나라가 최강자였다. 그러다가 몽골이 등장한다.
몽골의 기마부대가 무서운 이유는 보급부대가 없었다. 전쟁에 나갈 때 1인당 말 3~4필을 데리고 나가서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꿔 타며 속도를 높이고
게다가 시력은 3.0 이상으로 몽골인들은 워낙 말을 잘 다루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거칠 것 없었던 몽골의 세계정복 시기로 동쪽으로 고려까지 내려왔던 몽골이었다. 몽골은 남아있던 거란족을 제거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몽골의 상대가 안되는 거란족이 고려쪽으로 도망을 온다.
그때 고려의 집권자는 최충헌이었다.
뒤늦게 최충헌은 거란족을 토벌하기 위해 강동성에 군사를 보낸다.
그런데 그곳에서 원나라 몽골족과 조우하게 되고 당시 거란족을 쫓아 고려로 들어온 몽골군은 거란족 토벌을 위해 고려와 동맹을 제안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던 고려는 바로 동맹을 맺어
거란족 토벌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1218년 12월 강동성 전투이다.
이때 고려는 몽골과 처음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몽골과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그러나 이름만 형제의 맹약일 뿐 몽골족은 고려를 지배했다고 생각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추정 가설 3가지가 있다.
1. 고려가 범인-> 고려에서 활을 쏴 내쫓았다.
2. 몽골과 고려 사이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동진(금나라 무장들이 세운 나라)이 살해
3. 몽골의 자작극- 고려 침략을 위한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은 고려가 탐탁지 않았을 몽골은 고려가 금에 기울었다고 판단해서 몽골이 1차 침입을 하고
6년 전 저고여 살인 사건을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귀주성으로 이동하여 박서 장군과 연합하게 되고 귀주성을 공격하는 몽골군은 철옹성 같은 귀주성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이때 박서 장군이 쇳물을 부어 철벽 방어를 하고
귀주성 남문에서 방어 중이었던 김경손이 나와서 깃발을 든 깃발병을 공격하여 통신이 두절 몽골군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을 격퇴하게 된다.
김경손과 박서장군의 연합작전으로 몽골의 1차 침략을 막은 것이다. 사료에 승리를 자축하며 김경손이 소금을 불며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도읍이었던 개경은 당시 인구가 30~50만 명 정도로 굉장히 큰 도시인데 백성들이 강화도라는 섬으로 오게 되니 강화천도를 반대하는 대신들은 참수를 시키고 음력 7월 장마때 천도를 하니 아비규환이었다.
강화천도 후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어 기르는 돼지, 소등의 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다. 그 와중에 최우는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 없고 자신은 여전히 호화로운 삶을 이어갔다.
고려궁지
승평문
개경 만월대(고려 궁궐)의 문과 비슷하게 제작했다고 한다.
원래 수도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려했던 강화도의 궁궐로 주로 고려의 유적은 북한 쪽에 속해 있는데 고려 궁지는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남아있게 된 고려의 유적이다.
몽골을 피해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후 1270년 개경으로 환도 할때까지 39년간 사용된 고려 왕궁 터이다.
그 후에 조선 시대에는 이곳이 행궁으로 사용되었고 고려 시대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 때 인조가 피신한 곳도 강화도라 조선시대 건물도 함께 남아있다.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관으로 쓰이던 곳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외규장각 뒤쪽으로 올라가면 외규장각 넘어로 적의 침략을 알아보기 용이한 위치로 강화도 일대가 모두 보인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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