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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녀들

프랑스 혁명 원인과 전개 과정 (삼부회-테니스코트선언-바렌(느)사건-로베스피에르 최후)

by 365 ^^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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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들 5회 중]

 

오늘의 탐사지: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

주제: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 배경 (French Revolution of 1789)
프랑스 혁명이 있던 시기의 왕은 루이 16세 집권 시기로 우리나라의 영조 50년부터 정조 16년까지의 시기다. 당시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 재정 파탄의 원인 
프랑스 왕과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고 왕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미국과 영국의 미국 독립전쟁에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자금을 대고 그로인해 프랑스 재정은 바닥이 난다.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기근까지 생기며 임금의 30%를 가지고 겨우 빵 한 덩이를 살수 있을 만큼 국민들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왕실의 사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운동에 투자를 많이해 재정 위기
 계속된 흉년과 기근 
 

프랑스의 중세 계층 구조 
3가지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신분 성직자 제 2신분 귀족, 제 3신분 평민의 피라미드 형태로 평민은 과중한 노동과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이고 귀족과 성직자는 그저 즐기는 계층이었던 것이다.  왕은 신분제도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한 너무나 유명한 그림이다. 

 

 


삼부회 소집 

 

초기 중세 사회는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다. 1200년대가 되면서 보부상의 성장으로 인해 왕들이 상인들로 부터 세금을 걷을 방법을 강구한다. 자신의 영토에 보부상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계약을 맺고 복속관계가 아닌 계약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각 신분의 동의가 있어야 했기에 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세 신분들(성직자, 귀족, 평민)을 모아서 회의를 하는 신분제 회의인 삼부회가 있었다. 

 

 

 

루이 16세의 무리한 미국 독립운동 지원으로 나라 재정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각 신분들이 동의를 받아 세금을 더 징수하려고 했다. 귀족과 성직자의 반대에 부딫치자 삼부회를 열어 회의를 하기로 한다.

 


삼부회는 이름만 있었고 소집된 적은 거의 없었다. 루이 16세의 삼부회가 175년만에 처음으로 소집된 것이다. 


테니스 코트 선언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열어 평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으나 성직자와 귀족이 삼부회 소집을 방해한다. 베르사유 궁전안의 회의 소집 장소를 삼부회 소집 전날 폐쇄해 버린것이다. 이 사실에 평민들은 분노하고 이에 평민들은 베르사유 궁전 안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삼부회 소집 신분별 표결 방식(성직자 1: 귀족 1: 평민 1) 대신에 머리수 표결방식(성직자 1 :귀족1:  평민 2)으로 하자는 내용에 선언을 한다. 

 

국세의 대부분을 내고 인구수도 많으니 성직자, 귀족 한 표씩 =두표이므로 평민도 2표를 행사하는 평등을 추구하는 선언을 테니스 코트에서 했고 이것이 민주주의에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 테니스 코트 선언에 성직자+귀족은 평민과 대립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평민들은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혁명 성지 바스티유 광장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습격사건이 벌어졌던 곳으로 현재 바스티유 감옥을 허물고 1989년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그 자리에 오페라 바스티유를 건립했다. 
 
 

 

 

최초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스티유 감옥이다. 

 

 

 

 

콩코르드 광장에 단두대(목을 자르는 사형 기구)가 설치되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를 외치며 귀족들의 목을 베기 시작한다. 단두대(=기요틴) 에서 반대파를 365일 심판하고 처단 24시간 매일 사람을 처형한 것이다.   

기요틴 이야기 더보기 

 

 
혁명의 현장 
콩코르드 광장 
 

 

 

 

 

 

 

수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므로 비극의 역사를 교훈 삼아 붙은 화합이란 뜻의 이름 "콩코르드" 


바렌(느) 사건 
1791년 6월 20일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루이 16세는 국민을 버리고 마리앙투와네트와 그녀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도망을 가다가 국경 지역인 바렌에서 붙잡혀 다시 끌려오게 되는 바렌(느)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급진파와 중도파는 루이 16세의 처분을 놓고 대립한다. 


†사형 찬성 파(급진파) : 오스트리아 군대를 끌어들여 혁명파를 공격하려고 한게 분명하니 왕을 사형시키야 한다. †사형 반대 파 (중도파); 그냥 도망가다 붙잡힌 거다 죽이는건 심하다. 

 

 

 

국민 대표 로베스피에르
당시 평민대표는 법조인 출신의 로베스피에르였는데 루이 16세가 왕이 되고 어느 날 파리의 왕립학교를 방문하게 된다.

 

 

 한 학생대표가 환영사를 읽고 있는데 루이 16세는 이를 듣지 않고 무시하고 떠나버린다. 당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그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법조인이 되었고 그 아이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이다.

 

 

그는 루이 16세의 사형을 적극 주장했다고 한다. 국민대표 로베스피에르는 말한다. 

<1792.12 로베스피에르 연설 중에서> 

 

 

루이 16세의 죽음 
이렇게 1793년 1월 20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또한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처형 순간 그렇게 아름답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는 공포와 슬픔으로 백발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그 후 
절대 왕정이 무너진 프랑스에서는 1792년 국민의 대표기관<국민공회>가 설립이 되고

 

 

공포정치의 시작 

 

국민공회의 주도세력 3인방 자코뱅파가 프랑스 정치를 주도했다.

 

 

자유, 박애 ,평등의 신세계를 꿈꿨던 민중들에게 이 세사람이 폭력적인 공포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특히 문제가 많았던 마라 

 

이렇게 혁명의 이름으로 마라는 불필요한 살육을 일삼았다.  그는 피부병 때문에 목욕을 자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마라를 찾아온 평범한 여인 샤를로트 코르데가 찾아온다.

 

 

 

그녀는 "반동분자들의 명단을 드리겠습니다. " 라고 명단을 주는 척하다가 목욕하는 마라를 살해한다. 그것이 그 유명한 '마라의 죽음' 그림이다. 

 

 

공포정치에 맞섰던 그 여인은 배후를 묻자 말한다. 

 



혁명을 이끈 로베스피에르의 최후 
이에 충격받은 혁명동지 로베스피에르는 암살 위협을 대비해 더 무섭게 독재를 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을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단두대로 사람들을 처형하다가 결국 반대파에게 로베스피에르도 기요틴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의 봉건제도는 막을 내렸고 시민 계급이 등장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혁명이 있었는데 왜 민주주의 시작이 프랑스 혁명이었을까? 

 

영국에서도 이미 1688년 명예혁명이 있었지만 이것은 왕에 대한 귀족들의 권위를 높인것에 대한 한계가 있었고 미국의 독립혁명은 18세기 후반 영국령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가 본국의 지배에서 분리 독립한 정치적 변혁, 즉 미국의 이익에만 부합했던 혁명이었고 프랑스 혁명이 가지는 중요성은 프랑스 혁명은 인권의 등장이었다. 보편적인 인간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라는 인권 혁명으로 프랑스를 넘어서 모든 인간을 위한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면 

 

프랑스 혁명으로 이룬 프랑스 인권 선언문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 '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승인한 선언문이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권주장에 여성은 배제된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들은 투표권을 가지게 되지만 모두가 투표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로 남성, 백인, 땅을 가진 사람만이 투표권을 가진 것이다. 

 

1848년이 되어서야 모든 남성만이 투표를 할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형제애를 뜻하며 자매들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인간(L'homme)이란 동시에 남자를 의미한 것으로 인권 선언은 남성들의 인권 선언이었다. 혁명파의 여성들도 단두대에서 처형이 되었는데 이들을 처형할때 이 사람들은 남성이었다고 규정했다. 100년이 넘어서야 1944년에 비로소 여성들은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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