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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정몽주 죽음 at 선죽교, 단심가 하여가 진실 (영천 임고서원)

by 365 ^^ 2020. 9. 9.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53,54회]


오늘의 탐사지: 임고서원 -정자- 선죽교

주제: 정몽주의 일생과 죽음
출연자: 설민석 



임고서원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1553년 명종 8년에 창건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지만 1603년 , 선조36년에 재건했다



정몽주의 충절과 지조를 품고 있는 곳


정몽주


정도전보다 5살 많은 형으로 어머니가 꿈속에서 난초를 안고 있었다 하여 이름이 처음에는 몽란으로 불리다가 -9세때 또 어머니가 꿈을 꾼것이 집앞의 배나무에 흑룡이 똬라를 틀고 있었다고 하여  몽룡(9세)-15세 성인식즈음 아버지의 꿈에 중국의 대정치가인 주공이 꿈속에 나타나 덕담을 들었다하고 꿈에서 주공을 만났다 하여 몽주로 불리게 되었다. 


정몽주는 어려서 부터 신동었는데 학문에 열중하며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중 병으로 정몽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고려시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대부분 불교식으로 100일 상을 치렀던 것이 관례였는데 정몽주는 성리학의 유교 관례를 따른다. 



정몽주의 시묘살이
고려 말 성리학의 도입 후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 동안 공양 드리며 음주 금지, 부부관계 금지로 당시 시묘살이는 무척 드문 일이었는데 고려 최초 3년 시묘살이를 한 것이 정몽주였다. 


총 6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효심을 기념하는 기념비까지 세웠던 정몽주 


이렇게 시묘살이 후 과거 시험을 봐서 급제를 하는데 초장,중장,종장의 삼장원 세 차례 연이어 장원급제를 한다. 시묘살이 중 심신이 지쳤을 때지만 학문에 소홀하지 않았던 정몽주는 과거 시험 준비하는 유생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정도전이였고 이 둘은 정도전이 19세 때 처음 만나 그때부터 좋은 벗이 된다.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친원파 권문 세족이 다시 실권을 잡으면서 정도전은 혁명을 결심하고 이성계와 손을 잡는다. 또한 정몽주와 정도전은 명나라 주원장의 생일 때 큰 공을 세우면서 다시 지지 기반을 쌓아나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윤이. 이초 사건을 계기로 고려의 점진적 개혁을 원하던 정몽주는 급진적 혁명을 꿈꾸던 정도전과 돌아서게 된다. 그 이후 정몽주를 중심으로 이성계에 의해 초토화 된 반 이성계 보수 세력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몽주와 공양왕을 중심으로 세력이 다시 결집 되고 국면이 전환되면서 정몽주 파가 정권을 잡게 되고 정치적 대립 끝에 정도전은 유배를 가게 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성계는 사냥 중 낙마로 중태에 빠지게 된다.


정몽주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는데 정몽주는 군권을 쥔 이성계의 죽음을 바랐을 수도 있다. 이성계가 오기 전에 잔여 세력을 제거하자는 여론을 무시하고 공양왕은 태평하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세자의 위로연을 열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를 가마에 태워 개경으로 들어오게 되고 정몽주는 이렇게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이후 이방원은 정몽주 암살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이 자신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는 걸 알게 되고 주변의 만류에도 직접 이성계의 병문안을 간다.  정몽주는 적이지만 친구인 이성계에 대한 믿음으로 적진으로 홀로 뛰어든 것이고 이런 정몽주를 이성계는 반갑게 맞이했다. 


정몽주의 죽음

그러나 이성계는 의리를 지켰지만 아들 이방원은 달랐다. 밖으로 나가는 정몽주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고 그 날이 1392년 4월 4일 (음력) 이성계의 병문안 후 되돌아가던 정몽주는 이성계 집을 나와 선죽교라는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때 매복 중이던 이방원의 수하들은 이방원의 계획 아래 말을 타고 오고 있는 정몽주를 철퇴로 일격을 가격하지만 정몽주는 이 공격을 피한 후 급히 말머리를 돌려 도망친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쫓아와 선죽교 위에서 끝내 정몽주를 죽이고



정몽주의 단심가 



그는 그렇게 56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단심가, 하여가의 진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읊었다는 하여가와, 정몽주 충절의 시 단심가는 사실 이방원과 정몽주가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읊었다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추측하는 것이 이방원과 정몽주의 나이 차이는 20대와 60대로 시조를 나눌 수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고 또 다른 이유는 정몽주의 시문집 포은집 초판에는 단심가가 없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일촉즉발의 긴박했던 당시 상황에서 한가하게 시조를 주고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주장으로 추측컨데 나중에 지어진 시를 정몽주의 입장과 비슷하여 정몽주의 시조라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고 있다.




선죽교 

임고서원의 재현 선죽교


원래 선죽교는 개성에 있는 북한의 국보 159호다.

실제 북한 개성의 선죽교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으나 정몽주가 죽고 난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고 하여 선죽교로 변경되었다. 

실제 개성 선죽교 비명




정몽주가 죽은 자리를 우마차나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지 못하게 돌로 난간을 세워두고 그 옆에 또 다른 다리를 만들어 사용하게 끔 실제 개성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의미 깊은 선죽교 




임고서원 앞 500년된 은행나무 






고려의 멸망 조선 건국 과정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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