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랜드 참사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시의 서해안 바닷가 씨랜드 청소년 수련시설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다. 새벽 1시 20분경 301호에서 한밤중에 발생한 불은 삽시간에 건물 2층, 3층을 모두 태우고 인솔교사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544명이 잠을 자다가 사고를 당했고 그중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왜곡, 은폐 수사에 불만을 품은 유가족들은 전면 재수사를 요구했으나 화재의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묻혀버린 사건이다.
씨랜드 화재 발생
6월 28일 버스는 아이들을 태우고 경기도 화성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뉴스속도가 나온다. 청소년 화성군 씨랜드 수련원에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은 경기도 화성의 씨랜드 수련원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수영장과 놀이 시설이 인근에 갯벌까지 있어 초등학교와 유치원의 자연 학습장으로 인기를 끌었던 곳이다. 8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차 있던 곳으로 이날 이곳에서 잠을 하던 사람은 대다수 캠프 참가자 4~7세 어린이들을 포함 총 550명 정도였다.
1층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2,3층을 객실로 사용하고 있던 건물로 내부는 가운데 긴 복도와 양쪽으로 방 13개씩 총 26개의 방이있고 한 방에 15~20명씩 아이들이 배정되어 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양쪽 끝에 하나씩 있었다. 그날 하루 일과를 끝낸 시간은 밤 9시였다.
화재 당시 상황
화재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3층에 있던 태권도 송영규 관장이었다. 복도를 보니 3층 복도 전체에 연기가 자욱했고 화재를 직감했다. 그래서 화재 경보기를 눌렀으나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급하게 불이야를 목이 터져라 외쳤고 자고 있던 선생님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500명의 애들을 깨우기 위해 동분서주 아이들을 깨워 대비시키는 와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아이들은 무서워서 울고 선생님들은 소리지르며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대피시키느라 건물 전체가 아비규환이었다.
아이들 구출하는 송관장
어둠 속에서 송관장은 불이 난 곳을 찾아 불을 끄려고 방마다 물을 열어 보기 시작한다. 304호, 303호, 302호,... 301호를 여는 순간 불이 내뿜어져 나오고 시커먼 연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송 관장을 덮쳤다. 송 관장은 소화기를 바로 집어 들고 안전핀을 뽑고 소화기의 손잡이를 당겼으나 작동하지 않는다. 천장과 바닥에서는 뜨거운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고 유독가스로 인해 숨쉬기도 어려워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301호 방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옆방에서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입에 물수건을 물고 몇번을 이곳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아이들을 구했다. 그리고 다행히 302호 아이들을 모두 무사히 구출했다.
엄청난 속도로 번지던 불길
그러나 건물은 휘발유를 뿌려 놓은것 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불이 옮겨 붙어 그 시간이 20분이 채 되지 않았다. 방 하나 타는데 1,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2~3시간 만에 건물 전체가 타버렸고 소방차는 20분 만에 겨우 한대가 왔다. 그리고 뒤늦게 소방차들이 도착한다. 그러나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불길이 잡힌 것은 새벽 4시 30분경이었다.
잿더미 속 시신
소방대원들이 건물 안으로 진입하고 223호를 들어서니 뭔가 조그만 잿더미 하나가 보인다. 작은 것을 보니 아이 같았다. 이곳에 배정된 아이들은 부천 유치원 원생들로 74명이 왔는데 74명 중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한 아이가 6살 혜지로 1명이었다.
문제는 3층으로 불이 시작된 곳이라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예상대로 사체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318호에서 1명 306호 3명 한 명은 초등학교 교사, 한명은 씨랜드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불길 속에서 아이들을 구조하다가 불길에 갇혀 숨진 듯했다.
소망유치원 방 301호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화재의 시발점인 301호를 들어서는 순간 방안은 그때까지도 뿌연 연기가 가득했고 어두운 방을 불빛을 비추며 수색하던 중 창문 아래쪽 뭔가가 잔뜩 모여있다. 불에 탄 시신들이 전소되어 몇 명인지 조차 확인이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301호에는 소망유치원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7살 해님반 아이들이 있던 방이다.
사망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뉴스를 301호에 있던 김세라 아버지도 보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현실이 아닐 것이라고.. 다쳤더라도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도저히 믿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301호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총 18명이었다.
유가족들은 국립과학수사대를 찾아갔으나 국가수에는 유가족에게 시신이 너무 많이 훼손되어 알아보기 힘들 것이라 했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그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당시 교사와 원장 등은 어디 있었나?
앞방의 314호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이 났을 때 314호에서 누군가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고 원장의 진술은 엇갈렸다. 몇몇은 술을 먹고 있었고 몇몇은 10분 거리에 있는 마을 상가로 내려와 밤늦게 양주를 마셨다는 인근 주민 목격자도 있다. 어쨌든 아이들 곁에는 선생님들은 없었다. 단 한 명의 선생님이라고 있었다면 그 아이들이 한 방에서 모두 죽지는 않았을 텐데...
화재 원인은?
모기향?
국립과학수사대는 301호의 유류품들을 수거해 조사에 들어갔고 단 이틀 만에 방에 피워 놓은 모기향이 불씨라고 발표한다. 이곳은 모기가 많아 각방마다 안전망이 있는 모기향을 창틀에 피워놓고 잠을 잤다고 한다. 그러나 301호만 유치원 측에서 준비한 모기향을 방안 쪽에 더 피웠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전기사고?
그러나 유가족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국가수에서 최초부터 모기향을 중점으로 수사를 했고 전기 누전은 배제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의실험을 실시했다. 301호와 똑같은 내부재와 마감재를 사용해 이틀 동안 내부를 꾸민 후 실험을 진행했다.
모의실험 실시
실험은 모기향이 휴지, 옷가지, 이불, 이불 안에 닿았을 경우를 가정해 실험했고 당시 풍속과 습도를 똑같이 맞춰 진행했다.
실험 1시간 후 모기향은 그 자리에 탄 자리만 남을 뿐 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경우가 동일했다. 국내와 일본에서도 실험을 했었으나 모기향 자체만으로 발화가 될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는 결론이었다.
국가수의 성급한 결론
사고 원인은 이 화재 사고에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 되는데 모기향이 원인이라면 사고의 책임은 개인의 책임이고 원인이 전기 문제라면 그 원인은 씨랜드 측과 관리 의무가 있는 해당 관청이 되는 것으로 정부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수가 전기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국가수는 모기향 이외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지 않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씨랜드 무엇이 문제였나?
전기안전 부적합 판정
유족들은 씨랜드 주변의 허술한 전기 배선이나 관리 문제를 보며 전기 누전이나 과부하, 합선에 의한 가능성을 제기했고 인근 주민들도 예전에도 누전으로 불이난 적이 있다며 같은 의견을 제시했고 실제로 씨랜드는 97, 98년에 이미 전기안전 공사로부터 세 차례나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대형 참사 장소인 C동 건물은 98년 12월에 증축되어 한 번도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
소방도로 없음
또한 씨랜드는 소방 도로도 없어 허가가 날 수 없는 곳이었다. 진입로는 차 두대가 비키지 못하는 도로였고 그나마 넓은 도로는 사유지로 울타리까지 처져 있는 상태였다. 이로 인해 소방차 진입도 늦어져 더욱 피해가 컸다.
씨랜드 건물의 실체
참사가 난 씨랜드 건물은 2.3층을 시공하는데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1층의 콘크리트 건물 위해 컨테이너를 올려놓은 것으로 콘크리트 , 철근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컨테이너는 불이 나면 철판이라 내부가 뜨겁게 달궈지고 지붕은 철판 사이에 스티로폼이 있는 샌드위치 패널로 건물 지붕을 덮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래쪽 철판은 없어 스티로폼이 그대로 노출되어 다량의 유독가스가 발생하고 화재로 모두 불타 내려앉아 버렸다.
벽면은 스티로폼에 합판(톱밥으로 만든 판)+벽지를 발라 만들었다. 이것은 불쏘시게나 다름없는 구조였다.
전기 설비는 무허가 업자에게 맡겼는데 배선상태, 소방시설, 화재경보기 모든 것이 처음부터 불량이었다. 화재 참사가 나지 않았더라도 컨테이너를 연결하는 것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얼마든지 붕괴되는 다른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불법 인허가
이 건물은 어떻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관련 공무원 소환 후 씨랜드의 건축허가서, 설계도면 모든 것이 가짜였다. 공무원들은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 건축허가를 내준 것이다. 당시 직속상관이 허가를 내주도록 엄청난 압력을 행사했다고 씨랜드 인허가 과정에 대한 불법이 당시 사회복지 계장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윗선에 뭔가가 있다는 의혹이 컸기 때문에 군수를 포함 공무원을 조사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정부의 사건 수습 과정
관련자 판결
씨랜드 화재 참사로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원장 징역 5년, 벌금 5백만 원, 소망유치원 원장 징역 2년 6개월, 해님반 선생님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 화성군청 강 과장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그러나 나머지 관련 공무원 6명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유족들은 수긍을 하지 못해 재조사, 모두 수사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요청 했다.
씨랜드에는 소방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이런 시설 운영이 가능한 것은 경찰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경찰서, 군청 등 수사의 공정성과 적극성이 의문을 제기받을 수 있는 지역 토착 비리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주장 하며 국회, 정부청사를 찾아갔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유족 중의 한 명은 1986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88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사람으로 나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나 이 일로 훈장을 반납했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나서야 총리의 면담이 이루어졌으나 재수사를 약속했던 총리지만 추가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4개월 후 인천 인현동에서 씨랜드 참사와 비슷한 사고가 또 일어난다. 55명이 숨지고 79명이 다친 대형참사였다. 대부분 중고등학교 아이였고 원인과 과정 모두 씨랜드와 같았다. 정부가 발표한 300페이지 분량의 씨랜드 참사의 백서의 주요 내용은 사고 수습과 보상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원인을 분석한 부분은 달랑 7장에 사진은 두 개만 들어있는 백서이다. 이에 사고 유족들이 씨랜드 참사 백서를 다시 만들었고 피해보상금으로 한국 어린이 안전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7년이 지난 씨랜드 참사지만 현재 그곳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대학 졸업반이지만 여전히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사고 후 10년 동안 10명 이상 사망한 대형 재난 사고는 276건으로 6개월에 1번 꼴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출처 꼬꼬무 8회 /MBC PD수첩]
꼬꼬무 9회 전태일 열사 분신 노동운동 신호탄(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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