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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한국광복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by 365 ^^ 2021. 4. 7.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한국광복군 탄생과정은?

 

국가는 자주 국방이 가능해야 하는데 일본에게 나라 뺏기기 3년 전인 1907년에 이미 자주국방권을 잃었다. 순종은 군대 강제 해산(일제의 강압에 의한 결정)을 했다. 극히 쓸 데 없는 비용을 줄이고자 그때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 주대로 합류하고 망국의 역사가 시작되어 1919.3.1 운동이 벌어진다. 그 영향으로 탄생한 임시정부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를 했으나 무기 구입과 훈련을 감당할 자금이 없었던 임시정부는 돈이 없어서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1933년 중국 내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만들어지게 되고 거기서 마침내 군대 양성에 힘을 쓰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위협으로 1935년 1기생 졸업을 끝으로 한인 특별반이 해체된다.  그리고 이동을 거쳐 1940년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마침내 한국광복군 창설하게 된다. 윤봉길 의사의 핏 값이자 역사에 제대로 기술되지 못한 수많은 독립 영웅들의 피, 땀, 눈물 값으로 자주적으로 창설한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의 창립식이 리즈바역 근처의 가릉 빈관에서 있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의 창립식이 있던 곳이다. 

 

<리즈바역>

아파트를 통과하는 지하철 역. <리즈바역>

 

<가릉빈관 추정터>

가릉빈관 추정 터
가릉빈관 추정 터 2

 

한국광복군 조직체계

 

1940년 임시정부의 주축 한국독립당이 창설되고 무장세력을 모아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 임시정부 한국 독립당의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있는 것으로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직할 하에 있었다.

 

한국광복군 조직도 

⊙통수권: 임시정부 주석 김구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부사령관: 김원봉 

참모장: 이범석 장군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 홍범도 장군과 대활약)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지청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한 인물로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련관에 임명됐다. 

한국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처음에는 위기도 있었는데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군대여서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많이 간섭했다.

 

중국의 한국광복군 행동 준수 9개 항목.

1941년 한국광복군 행동 준수 9개항목.1
1941년 한국광복군 행동 준수 9개항목.2
1941년 한국광복군 행동 준수 9개항목.3

 

한마디로 중국군사위원회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말란 소리였다. 그러나 김원봉이 합류를 하면서 점점 간섭에서 벗어나 혁혁한 전과를 세우기 시작한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김원봉 업적과 활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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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선전부 창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 1년 후인 1940년에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방송을 통해 알렸고 1942년 본격적으로 방송을 했다.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심리전인 사기진작을 위해 꼭 알려야 했던 한국광복군 소식을 1943년까지 김원봉 선생님이 비정기적으로 직접 육성으로 충칭 국제 방송국에서 한국광복군의 참여를 독려하는 선전방송을 진행했다. 1944년에는 선전부를 통해 월,수,금 매주 저녁 10분 정규방송을 했다. 

 

 

 

 

 

 

 

 

 

1944년 4월 2일부터는 정규 방송으로 중국 구민당과 합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와 전시 상황을 알리고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한국광복군 선전방송을 한다.  방송 효과가 아주 좋아 선전방송을 듣고 수많은 일본군이 탈영, 귀순하기도 했던 선전방송의 효과였다.

 

 

단파방송 밀청 사건 (1942)

이제 일제는 선전방송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탄압했다. 현 kbs 경성방송국 직원 40여 명을 체포하고 일반인 포함 모두 150여 명이 처벌당한 단파방송 밀청 사건으로 1942년 단파방송 청취에 벌금형과 실형 선고하는 사건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사람들은 일제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 방송으로 듣고 축제 분위기였다.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복원하고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을 한 건물이다. 한국광복군이 광복 이후에 한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사용했던 장소이다.  아직 일반 관광객들에겐 공개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2019년 3월 복원이 된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내부 1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내부 2

 

 

한국광복군 활약

 

제국주의 일본과 나치즘 독일, 파시즘 종주국 이탈리아 3개 국가 동맹이 일으킨 전쟁이 2차 세계대전이다. 이에 대한 미국 임시정부도 3개국에 대해 대일 선전 성명서를 발표한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하고 1932년 만주국을 성립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불편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였다. 

 

한국광복군의 대일선전포고(1941년 12월 10일)

4개국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 )과 abcd 포위망이 구축되고 일본의 원유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한다. 이에 이성을 잃은 일본은 미국 태평양 함대가 가진 4대의 항공모함들(전투기를 싣고 다니는 배)만 없애면 미국 와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해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다. 이에 맞서 미국을 주축으로 한 26개국 연합국도 독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때 우리나라 한국광복군도 역시 연합군으로 참가한다. 

 

 

 

 

 

 

 

 

영국과 인도 미얀마 전선 투입 (1943년)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 사회에서 당당히 나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3년 영국군의 파견 요청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그 부대 이름이 인면 전구 공작대였다.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서 활동하기 위해 조직된 부대) 

 

인면전구공작대 

 

 1943년 영국군의 파견 요청으로 2차 세계대전 참전하게 된다. 인도와 미얀마에서 작전을 벌인 한국광복군 소속 공작 대원들은 일본어, 영어에 능숙하고 머리도 좋고 신체 건강한 광복군 9명을 선발한 특수부대로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는 인도로 이동 후 암호 해독, 포로 심문, 대적 선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영국군 제17사단이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해 영국군 탈출에 기여 영국 사단장의 감사의 치하를 받았던 부대이다.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에 당당히 나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영국과 연합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큰 의의와 족적을 남긴 인면 전구 공작대이다.  

 

 

한국광복군 소속 '정진군' 

 

미국 OSS부대와 연합 작전 훈련

한국광복군은 1945년 (미국 전략 첩보국 CIA의 전신)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미국 전략 첩보국)와 손잡는다.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첩보국 oss와 연합해서 국내로 공격해 들어가는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다. 

 

한국광복군 소속 정진군
미국 전략 첩보국 CIA의 전신인 OSS

 

 

1945년 9월쯤에 미국의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 5개의 전략지점인 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 등지를 침투해서 적 후방 공작을 전개하는 목표를 가졌던 정진 군으로 유사시 요인 암살, 주요 시설 폭파 등 가능한 전투부대였다. 

 

독수리 작전

국내 정진군을 선발, 훈련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고 광복군은 하루 8시간씩 훈련을 받고 한반도 침투를 위한 첩보, 야전 교육을 실시한다. 

독수리 작전 문서
이  맹훈련을 통과한 38명의 한국광복군 

 

한미 공동 한국광복군 국내 진공작전은 중지

 

38명의 한국광복군과 국내 침투를 위한 한. 미 공동작전을 준비한다. D-Day가 8월 13일이었다.  임시정부와 미국이 일본에 반격하기 위한 비밀작전을 펼치기 전 일본은 갑작스럽게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8월 15일에 공식적으로 항복하기 전 1945년 8월 10일 포츠담 선언에서 연합국이 요구한 항복을 받아들인 일본이었다. 이 소식이 임시정부에 전해지면서 한미 공동 국내 진공작전은 중지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은 하늘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을 기회를 잃고 더 나아가 주도권을 잃을까 걱정했던 김구 선생의 생각은 현실이 된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으로 나뉜 한반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을 위해 미국이 파견한 비행기는 15인승 비행기 단 한대뿐이었다. 누가 먼저 탈지 결정하기 위한 국무회가 열어 그 비행기에 김구, 김규식, 이시영, 엄항섭 등 15명이 11월 23일 날 비행기를 타고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다. 

 

 

모두와 그 기쁨을 나눌 줄 알았지만 미군이 극비리에 진행한 탓에 쓸쓸히 조국에 돌아오게 된 임시정부 요원들이었다.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 모습 (오른쪽 눈물을 훔치는 이시영 선생)

 

 

혹자는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독립을 얻었다고 미국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펼쳤던 치열한 항일투쟁의 역사에서  분명한 대한민국의 뿌리, 대한민국과 국군의 뿌리는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고 우리의 독립은 단지 주어진 것이 아닌 수많은 이들의 피 땀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데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선녀들 리턴즈 25,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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