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내용
-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증거
- 직지심체요절 발견 장소
- 직지심체요절 만들어진 흥덕사
- 직지심체요절이란?
- 프랑스에서 반환하지 못하는 이유
- 고려의 금속활자 발전 과정
- 청주 직지코리아 페스티벌
- 금속활자 만드는 법
영국 BBC , TIMES , 위싱턴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등 세계 유명 언론은 지난 1000년간 인류문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은 금속활자라고 했다. 하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수십 장에 달하는 목판이 필요했던 중세 목판인쇄술 시대는 비싼 책값 때문에 소수의 귀족과 학자들만이 정보를 독점하던 당시 금속활자의 등장은 대단한 정보혁명이었다.
짧은 시간에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책속의 정보들은 빠르게 대중에게 전달되기 시작한다. 이 정보혁명을 기반으로 서구사회는 르네상스(1400~1530년)-종교개혁(15세기 후반~18세기 초)-산업혁명(1760~1840)-시민혁명(17세기~18세기)을 이끌면서 인류 역사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의 시작이 1455년 서양 최초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서에서 출발한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라는 증거
그러나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만국박람회의 한국관에서 1377년에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이 전 세계에 처음 소개된다. 금속활자의 아버지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보다 78년을 앞섰던 우리나라의 직지심체요절로 1377년 고려 시대에 만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였던 것이다.
▶직지가 알려지기 전 세계는 1455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42행 성서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을 발명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직지의 맨 마지막장에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직지가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 간행된 것이다.
▶12세기 말, 13세기 초 1234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상정 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서양보다 200년 앞선 1236년에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전 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 고어는 연설중에 세계 최초의 발명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기술이 한국을 방문했던 교황 사절단에 의해 전달되었던 기술이라고 언급했고 그 사실을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을 통해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책을 만든일에 종사한 적이 없고 금속세공 기술자였던 구텐베르크가 활자 인쇄에 대한 기반이 전혀 없던 유럽에서 20년 만에 금속활자 기술을 만들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고려에서 발명되고 조선이 발전시킨 이 금속활자 인쇄술이 여러 단계를 거쳐 실크로드 북쪽 루트인 초원의 길을 통해 서방으로 전달되었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2016년 10월 교황청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의 충숙왕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편지는 직지가 발간되기 44년 전 쓰여진 것으로 현재 알려진 것과 달리 더 이른 시기에 고려와 서양의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문서이다.
직지심체요절이란?
직지심체요절의 정식명칭은 '백운화상 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이를 줄여서 '직지심체요절'이라고 부르며 1377년 고려말 백운 스님이 선불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경전과 격문 중에서 좋은 구절만 편집해서 만든 불교서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이다.
직지심체요절이 만들어진 장소
청주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인 흥덕사지에서 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되었다. 흥덕사지는 고려사에도 언급이 잘 되지 않는 지방의 작은 사찰로 이는 그시기에 이미 지방의 작은 사찰에도 보편화될 만큼 활자 인쇄가 발달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현재 직지는 흥덕사 바로 옆 청주 고인쇄박물관에서 영인본을 소장하고 있고 진본은 프랑스 박물관에서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어떻게 발견되었나?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박병선 박사 서고를 정리하다가 책 한 권을 찾아내고 5년간의 연구 끝에 이를 '세계 도서박람회' 출품하고 <직지>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증명해 낸다.
직지심체요절을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이유
1886년 고종 23년에 조불 수호통상조약 체결(고종 23년에 조선과 프랑스가 체결한 통상조약) 후 대한제국 시절 초대 프랑스 공사(1897년-1910년)였던 콜랭 드 플랑시가 정식으로 직지심체요절을 구매를 해서 가져갔고 이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현재는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 도서관에서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단독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스로부터 직지를 반환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나 합법적으로 구입해간 것이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는 어떻게 금속활자를 발전시켰나?
금속활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고려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을 가진 나라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목판의 단점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야 되고 오랜 시간 말리고 새는 일련의 과정의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
그래서 금속활자본이 발달했던 것으로 유추한다. 당시 고려는 이미 아주 섬세한 금속공예품을 만들어 낼 정도로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특히 금속활자와 주조법이 같은 고려의 화폐 해동통보는 이미 1102년에 주조되었다. 이 기술이 금속활자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목판은 한개의 판에 글자를 새기게 되어 겹치는 글자가 많았지만 금속활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조합이 가능했고 글자 자체도 더 선명하고 오래갔다. 쉽게 마모되지 않고 보관이 편리하며 모양이 변형될 걱정도 없기 때문에 효율성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금속활자 단 2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북한의 소장하고 있는 <전>자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복> 자 단 2개뿐이다. 2개의 활자 밖에 실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증거로 굉장히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청주 직지 코리아 페스티벌 & 청주문화재야행
청주시는 2001년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9월 4일을 기념하기 위해 '직지의 날'을 제정했다. 현재 직지의 가치를 되새기고 즐기는 청주직지 코리아 페스티벌을 10월에 개최하고 있다. 2003~2014년까지는 지역축제였던 것을 2016년도에 처음 국제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2년마다 국제행사를 진행 중이다. 2018년에 진행되었던 행사에서는 50개국 80여 박물관 참여 인쇄 관련 정보 공유했고 고려시대 의복 입기, 금속활자 주조과정 시연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었다.
금속활자가 주물사 주조법을 통해 만들어졌음을 시연한다. 또한 10월 초에 개최되는 청주문화재야행이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다양한 문화재와 함께 공연과 전시회 문화재를 즐길 수 있다.
금속활자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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