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41회]
오늘의 탐사지: 종묘
주제: 종묘 제례
출연자: 전광렬
종묘
종묘는 유교의 상징 건물로 충과 효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게 가장 큰 의식 중 하나다. 종묘는 역대 왕들에게 제향(=제사)을 올리는 조선의 유교 정신이 집약된 매우 상징적인 장소이다.
종묘제례의식
지속성이 중요(끊기면 유네스코에 등재가 안되므로 현재까지도 계속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종묘사직의 뜻
종묘는 왕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 사직의 사는 토지의 신 , 곡식의 신 직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유네스코란?
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전 세계의 보존, 보호해야 할 문화. 자연유산을 지정하여 보호해주는 국제연합전문 기구이다. 1950년 6월14일 유네스코에 가입한 대한민국은 2020년은 유네스코 가입 70주년을 맞이했다.
유네스코 등재 유산의 종류는?
♤세계유산: 문화유산,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나뉨
♤세계기록유산- 동의 보감 , 조선왕조실록
♤인류무형문화유산- 줄다리기,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 굿 ,공연 예술. 축제. 전통기술 등의 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 조건
완전성은 유산의 보편적 가치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지
진정성 유산의 재질, 기법 등에서 원래 가치를 보유하였는지
모든 세계유산의 등재기준인 완전성과 진정성이다. 경복궁은 조선 시대 대표 궁궐이지만 숱한 전쟁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여려 번 불타고 추정 복원 됐는데 경복궁에 가면 빈 공터가 많이 있다. 이렇게 터만 남겨 놓은 이유는 전체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
종묘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유는?
종묘를 포함한 한양이 다 불탔는데 300여 년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 할 때까지 경복궁은 사실상 방치됐었지만 반면 종묘는 비교적 빨리 복원 했다. 6.25전쟁 이후 폐허 속의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의 원조를 많이 받았는데 가장 중요한 도움을 준 곳이 유네스코이다. 교과서 인쇄공장 건립지원을 지원했고 매년 3천만 권의 교과서 발간.학교 건립 등 교육의 정상화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70년 전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던 우리나라가 전쟁의 페허를 딛고 일어나 유네스코와 함께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신했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 복원 사업
2001년 아프간 테러조직 탈레반이 파괴했던 유네스코 세계유산 바미얀석불터를
종묘 삼도
삼도는 왕, 세자, 조상신이 다니던 길이다.
조상신이 다니는 가운데 길 신로
왼쪽 세자 동쪽이 임금
종묘의 나무에는 살충제을 치지 않는다.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풀이나 나무에 벌레가 생겨도 살충제 금지한다.
재궁
왕과 세자가 제향을 준비하던 곳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기 일주일 전에 제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는 서약 '서계'
제례 일주일 전부터 절대 하면 안되는 것들
선조들을 모시기 위해 정갈한 몸과 정신을 가꾸는 시간
제례 하루 전날
신도를 따라 국왕이 제일 먼저 기거하는 장소 재궁이다.
재궁의 북쪽에 위치한
어재실
동쪽에 위치
세자재실
서쪽에 위치
어목욕청
제례 당일
종묘 정전에서는 축시(1시~3시)부터 제향 준비가 시작되고 순서대로 제향 진행 후 보통 7~9시쯤 끝난다.
1년 간 몇 번의 제향을 했을까?
정조 재위기간 기준으로 한 해 동안 실시한 제향이 무려 347건이었다.
왕은 유동적으로 참석했고 왕릉에서는 약 160번 정도 나머지는 종묘사직이나 선농단,선잠단 등에서 지냈다.
먼저 동월랑에 보관된 63가지의 제기를 꺼내서 음식을 담는 제기는 제례 시작 전까지 한지로 밀봉한다. 제사 음식의 양도 어마어마해서 종묘제례 때 선왕에게 올리는 음식 가짓수만 43종, 왕비에게 올리는 13종도 더하면 총 56종, 계비까지 포함되면 13종을 더 추가해 69종이었다.
Q.제사에 올리지 않았던 고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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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고기
고대 중국에서 가장 신성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소,양, 돼지라 여겨 조선도 따라서 올린 고기들
재궁에서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향함
종묘 정전
무려 101m 우리나라 최장 단일 목조 건축물 종묘 정전은 화려함 대신 신성함을 추구하며 현재도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가 모셔져 있는 종묘 정전
태조부터 순조까지 여러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조선시대 모든 왕의 신주가 있는 건 아니다.
유교의 개념
유교는 학문이었던 유학이 종교화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의 육체는 선산(무덤)에 묻히고 영혼은 신주에 담긴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선대 왕을 모시듯 극진하게 보관하며 신주는 왕실의 성물처럼 여겨졌다.
불천지주란?
왕이 승하를 하면 위폐를 가지고 이곳에 와서 신주를 정전에 봉안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가 부족해진 정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후대 왕과 신하들이 회의를 열어 짧게 생을 마감하거나 업적이 적은 왕들은 정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중에 영원이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를 불천지주라 하여 불천지주 : 세종대왕, 태조 이성계 등
정전에 모셔지지 않은 왕들은 어디에 있을까?
예종, 인종같이 단명하거나 사도 세자처럼 훗날 추존된 왕은 정전 옆의 영녕전에 모시게 된다.
태조 4년까지 7실의 건물이었던 원래의 정전은
나중에 증축을 해서 현재 19실까지 있다.
지금도 찾아 볼수 있는 증축의 흔적 (지붕색이 다르다)
중축 시기에 맞춰 시대별 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정전의 바닥은 왜 울통불퉁할까요?
왕들이 있는 곳이라 예를 갖춰 걷기 위한 용도 (바닥이 편하면 앞만 보고 걷기에)
바닥부터 지붕까지 의미가 담겨 있는 종묘 정전이다.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던
종묘제례악
종묘제례 당일 날이 되면 제사 시작에 맞춰 울려 퍼진 종묘제례악.
고려 시대의 궁중 음악이었던 속악 향악을 제사 때는 중국의 음악 아악을 연주 했는데 그래서 세종대왕이 우리의 음악을 만든 것이 종묘제례악이다. 그 당시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로 사용을 못하다가 실질적 사용은 세조(세종의 아들) 부터 사용했다
종묘제례악 궁중 음악 연주자인 악공과 악상들은 노래, 악기, 춤까지 모두 완벽하게 해야 했다 .
세종대왕이 후대에 전하고 싶었어 만든
동양에서 최고 오래된 악보
정간보
훗날 세종의 증손자 성종은 포스트 세종을 꿈꾸며 음악 백과사전 악학궤범을 편찬한다.
이 데이터 베이스가 있었기에 중간에 전쟁이 있고 위기가 있어도 종묘제례악이 사라지지 않고 전해 질 수 있었다.종묘제례악은 정간보가 없었다면 완벽하게 재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종묘 상월대
종묘제례의 핵심이자 근본인 신주
전란 시에 신주의 보존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몽진길에도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신주 당시 35위의 신주였다. 그렇게 종묘에서 신주를 옮긴 사이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종묘에서 살았다. 영혼들이 괴롭히고 이유없 이 죽고 해서 종묘를 불태우고 남별궁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녕전
종묘에 모시지 않은 두 왕은?
신주를 받들지 않는 다는 건 영혼을 받들지 않겠다는 것으로 후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두 임금은 연산군 광해군이다.
연산군은 불통의 왕
연산군 때 믿기지 않는 법이 있었다.
우어금지법
우어금지법은 백성들이(두사람) 마주 보고 서로 대화를 못하게 하는 법이다. 비록 부자간이라도 관에 보고한 뒤에라야 서로 만나서 말해야했다. 또한 신하들 간의 대화를 법으로 금지했다. 소통을 금지하여 역모를 막기 위한 최악의 법이었다.
또한 신하들에게 신언패라는 나무 패를 차게 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였고 나중에는 극단적으로 한글 금지령까지 내려 자신을 향한 비판을 차단하기 위해 지독한 함구령을 내려 귀를 닫고 눈을 감은 불통의 왕이 연산군이었다.
광해군의 불효
지금 시대에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재평가 여지가 충분해서 연산군에 비해 억울할 수도 있지만 당시 시각으로 보면 부모의 나라인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손을 잡거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친엄마는 아님)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게 한 왕으로 유교적 시선에서 명백한 불효였다. 광해군 일가는 인조반정으로 폐위 후 강화도 유배 시절에 유배지에 위리안치된다.
유배생활을 견디지 못한 폐세자는 (광해군 아들) 탈출을 계획 밤중에 은덩이와 쌀밥을 챙긴 뒤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조선판 쇼생크 탈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보면 무려 70척(약 21km)의 땅굴을 지나 탈출을 눈앞에 둔 폐세자는 나졸에게 바로 잡혀 이후 폐빈(광해군 며느리)은 스스로 목을 매고 폐비(광해군 부인)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함.
▼종묘에 공민왕 사당이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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