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1회 2부]
오늘의 탐사지: 오대산 사고
주제: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며 조선시대 총 27명 왕에 대한 기록이다. 고종,순종의 기록은 일제 강점기에 작성돼서 진실성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왕의 생전에 집필하지 않고 사후에 집필을 완성 시킨다.
왕의 서거 후 실록청을 만들어 서거한 왕에 대한 모든 기록을 모으고 24시간 내내 왕의 곁에서 기록한 사초부터 비서실 일지인 승정원 일기, 상소문까지 모아서 고증,편집하고 모아 놓은 것이 실록이 된다. 하지만 쫓겨난 왕의 기록은 실록이라고 하지 않고 일기라고 부른다.
▷조선왕조 실록은 엄청난 양인데 3년 전만 해도 2077 책이던 실록이 추가로 계속 발견되면서 현재는(2019.10.27) 2219책으로 증가했다.
▷한권의 두께=1.5cm x 2219= 약33m 아파트12층 높이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왕조실록을 4군데 분산해 보관했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그러나 임진왜란 때 사고가 모두 불탄다. 하지만 다행히 전주 사고 하나가 살아 남게 된다.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 실록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임진왜란때 전주 사고본 실록을 지키는데 자청한 두 선비 , '안의' 그리고 '손홍록' 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평범한 선비였다. 전쟁의 정황이 급박해지고 이미 선조는 몽진했고 실록을 안전한 곳으로 지키기 위해 선비들과 백성 100여 명을 모아 옮기기는데 무려 64 궤짝이였다.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 사고에서 옮긴 약 1000권이 넘는 서책들을 들고 전주-정읍-묘향산-강화도로 피난을 간다. 임진왜란 이후 강화도에 도착하는데 10년 걸리고 이동거리만 약 2000리= 약785km로 서울과 부산을 걸어서 왕복한 수준이다. 임진왜란을 피해 실록을 옮겼던 안의와 손홍록은 당시64세,56세였다. 그래서 전주 사고본 실록을 지켜냈기에 그것으로 다시 다섯본을 만들 수 있었고 우리가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알리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지킨 전주사고본을 다섯 본으로 늘려서 산속 깊이 보관하기로 한다.
조선후기 4대 사고
조선왕조실록 완성 과정
실록이 완성되면 초초,중초본인 이전의 종이는 물에 씻어서 재활용하는 이를 '세초'라 부른다.
Q.세초 작업을 한 곳은?
조선왕조 실록 기록에 대한 일화
태종 때 태종 이방원을 사관들이 쫓아다니며 낱낱이 기록했다. 사관 민인생은 실록이 처음 시작되던 때라 사명감이 투철했던 사관이다. 민인생을 편전에 못 들게 한 태종은 '오늘은 민인생이 없구나' 했는데 병풍 뒤에 숨어서 기록을 하고 있었다.
또한 어느 날 이방원이 좋아하는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이런 장면을 쓰지 말라고 했으나 이 말도 함께 기록한다. '말에서 떨어진 일을 쓰지 말라고 하셨다.'
세종때 세종대왕은 할아버지인 태조실록을 봤다. 조선 초기라 실록 관련 제도가 확립되기 전 에외적인 경우이고 공정성을 이유로 세종 이후에는 실록 열람을 금지했다.
실록을 보관했던 사각(사고)
일제에 의해 훼손된 조선왕조 실록
1913년 일제 강점기에 300년간 안전하게 보관한 실록을 일제는 주문진항을 통해 강제로 반출한다.
오대산 사고본의 운반 기록에 따르면
일제에 의해 기증하는 방식으로 동경제국대학에 반출되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타고 그나마 화를 면한 실록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한다.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있다가 도쿄대에 남아있던 오대산 사고본 실록 47책이 환수되어(2006년도에) 현재 총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 사고본
임진왜란 이전 제작된 조선왕조 실록 중 교정쇄본(수정본)만 보관된 곳이 오대산 사고이다. 그래서 오대산 사고본에는 교정 흔적이 많이 보인다.
고정한 흔적은 이 실록이 오대산 사고본이라는 증거이다. 당시 조판과 교정을 파악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실록 보관 방법
실록 궤에 창포나 천궁 같은 약재를 넣어 벌레를 예방하고
3년에 한번씩 포쇄를 한다.
기록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
또한 해동지도에 사고의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그만큼 사고를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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