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강화도 조약 이후에 근대 문화를 배우기 위해 다른 나라를 방문하기 시작한다. 첫번째는 일본으로 갔던 수신사가 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 초대 외교 형식으로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해 1876년 김기수를 포함한 76명을 1차 수신사로 파견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 체결에 따른 의례적 방문이었다면 그 이후 80년도에 보다 적극적으로 외교 문제와 일본의 물정 탐색 등을 위해 4년 뒤 1880년 김홍집을 포함한 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1882년에 체결하며 미국인 공사가 조선에 부임했고 그 답례로 일본에 이어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가 있다.
보빙사 일행은 일본에서 약 1개월간 머물렀다가 일본을 떠나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 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위싱터에 도착 조선을 떠난 지 약 2개월의 장거리 여정이었고 미국의 풍경에 압도 되었던 보빙사 일행
보핑사 에피소드
미국의 아서 대통령을 접견할 때 아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로 인사하는 보빙사의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보빙사 그룹이 미국 방문시 가장 놀랬던 것은 전기였다. 통역으로 간 유길준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의 엘리베이터를 처음 탔던 보빙사 일행 철창 같은 분위기의 엘리베이터에 놀랐다.
보빙사의 리더였던 민영익은
힘과 권력을 가진 민영익이 개혁에 앞장서야 하는데 민영익은 변하지 않았다. 새내기 보빙사 일행은 개혁의지를 불태웠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고 다 가진 민영익은 개혁에 의지가 없어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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