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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historical spot signs/Temple

길상사와 법정스님 /김영한과 백석 이야기

by 짱신나^^ 2023.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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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길상사 입구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의 본당으로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이 가운데 좌-지장보살/우-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길상사 극락전 (단청이 없음 / 무소유 실천)
공덕비

다리를 건너면 공덕비 하나를 보게 된다. 공덕비에는 '시주 길상화 공덕비' 라고 적혀있다. 길상화는 법명으로 본명은 김영한이고 공덕비 뒤편으로 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위치해 있다. 

 
 
길상사는 1997년에 세워진 불교사찰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찰이 아닌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던 자리에 사찰을 지은 것이다. 길상사 전체 부지 소유(7000평 정도)가 김영한의 것으로 사유지였던 곳을 사찰을 만들어 달라고 시주를 했고 김영한 법명 이름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 사찰이름을 길상사로 지었다. 
 
*요정: 연회를 즐기던 고급 주점으로 1970년대 정치인들의 회동 장소였다. 
 
옛날 3대 요정으로 삼청각, 오진암, 대원각이 있었는데 그 중에 대원각이 바로 길상사의 전신이다. 
 
 
길상사 특징 
 
원래 사찰은 일주문-천왕문을 지나면 본당이 보이는데 길상사는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전이다. 또한 전통 사찰의 일자구조로 엄숙한 느낌인 반면 극락전이 ㄷ자 모양으로 따뜻한 느낌을 준다. 
 
길상사 극락전 구조
 
 

김영한과 백석의 사랑이야기

김영한은 집안이 가난해서 16세에 기생이 된다. 여창가곡과 궁중무에 특출났던 김영한은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그러나 신윤국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함흥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자 유학도중에 함흥으로 오게 되게된다. 
 
 
 
김영한은 함흥에서 기생으로 일을 하다가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있었던 백석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게 되고 백석이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주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으나 백석의 아버지는 김영한이 기생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백석을 다른 사람과 강제 결혼시켰다. 

 

백석 시인
 
그러나 백석의 마음에는 자야뿐이었고 다시 함흥으로 와서 함께 지내려 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기생 신분이 백석의 앞길을 막는다 생각해 거절한다. 이후 백석은 만주로 가게 되고 이후 남북이 갈라지면서 백석은 북에 자야는 서울에 있게 되었다. 
그 뒤로는 그들의 교류는 없었다. 
 
백석의 시비 
 
그 당시 시가로 이곳은 약 1000억원 정도였고 이를 김영한은 통크게 기부한 것이다. 사람들은 솔직히 아깝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그녀의 대답은 이러했다. 
 

김영한 여사의 유언은 죽은 후 화장을 해서 눈이 펑펑내리는 날 길상사 뜰에 뿌려 달라는 것이었다. 백석의 시처럼 말이다  그래서 흰 눈 내리던 날 길상사 곳곳에 그녀의 유해가 뿌려졌다.

 
 
 
 

길상사와 법정 스님

이 절이 유명한 것은 김영한의 기부로 만들어진 이야기와 법정스님이 이곳에 많은 생을 머물다 돌아가셨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절에는 법정 스님이 머물던 방을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있다.
 
70년대 경제상황은 한국전쟁을 막 겪고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을 정부 주도형으로 경제개발을 실시하던 때였고, 그러므로 70년대에는 정부관료와의 로비를 위한 많은 고급요정들이 이 근처에 많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부를 축적했고 1990년대에는 부자의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이루고 난후에 마냥행복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고 있었고 부를 축척하는 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때 유행했던 말이 없이 살때가 더 행복했다였다. 이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이 책에 감명받은 김영한이 이 대원각을 통째로 법정스님에게 기부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대원각은 시가로 1000억원(100 billion won/100 million $)이 넘는 돈이였다. 그래서 이 길상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요즘 다시 미니멀리즘 /미니멀 라이프 주목을 받고 있다. /요즘 세상은 너무 풍족해서 걸리는 몸과 마음의 병이 너무 많다.
 
 
 

진영각

법정 스님이 모셔져있는 곳으로 진영각은 법정스님이 입적한 곳이고 진영각 담벼락에는 법정 스님을 화장한 후 유골이 모셔져 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한 진영각
진영각 내부에 마련된 전시 공간

진영각 내부에는 법정스님이 생전에 사용하셨던 물건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법정 스님의 대표적 저서 <무소유> 로 김영한은 무소유에 감명받아 법정스님에게 이 절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으나 스님은 거절했다. 이에 10년 동안 부탁을 했다. 그러나 끝내 주지스님의 자리는 거절하고 조계종 송광사의 분원이자 말사로 지정해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 운동' 의 근본 도량으로 지정해서 대원각을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사찰로 정비했다. 

 

 

길상사 개원 법회 당시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해서 축사를 부탁드렸다. 그 화답으로 법정 스님도 명동성당에서 특별강연을 했다. 법정스님은 타 종교인과의 만남에도 적극적이셨고 종교화합에 앞장섰던 분이다. 

 

길상사 입구에는 관세음보살 조각상이 있는데 혜화동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을 만든 최종태 조각가의 작품이다. 

길상사 창건 당시 법정 스님의 바램은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휴식과 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 법정 스님 유골 모신 곳 진영각 담벼락
 
법정 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장례식을 하지마라 / 관도 짜지마라/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등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소유를 실전하셨던 분이다. 
 
법정스님의 유언
 
 
 

나무의자

1970년대 초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법정 스님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독재정권에 저항을 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법정스님은 송광사의 불일암에 은거하면서 깔끔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다. 법정스님은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고 이 의자도 땔감을 이용해 만든 의자이다. 
 
법정스님이 사용했던 나무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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