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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고주리,제암리 학살 사건 in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전동례 할머니 증언)

by 365 ^^ 2020. 8. 16.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27회,51회]

 

오늘의 탐사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주제: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

 

 
 
일제 강점기 속 경기도 화성의 대표적인 사건 
제암리 고주리 학살 사건 
 

 

 

화성 제암, 고주리 학살 사건때 희생된 지역 주민의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

 


 

 

제암리 학살사건  

 
화성의 여러 지역에서 계획적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반드시 주모자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 주모자는 제임리나 고주리에 있을 것이다 추측해 그렇게 제암리로 토벌대를 보낸 것이다. 

 

아리타 일본 육균 중위가 이끄는 11명의 일본군이 제암리로 침투해 4월 15일 제암리에 도착한 아리타는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고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아 넣은 다음 교회 문을 잠그고 창문 틈 사이로 총구가 안으로 겨눠지고 일제 사격을 시작한다. 그 후에 주민들이 모인 교회에 불을 지른다. 불 속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을 총검으로 살해하고 그렇게 23명의 제암리 주민들은 무참히 학살된다.  

 

 
그 중에는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어 아기와 함께 교회당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는데 불이 나자 아기를 창문 밖으로 내밀었는데 그대로 사살..
 

 

 
그리고 교회당 밖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은 총검으로 찌르고 총을 쏴서 교회당에 있던 전원이 사망한다. 교회당의 불길이 5시간을 넘게 타 들어 갔다.  
 

 

총 소리에 달려가던 남자들의 아내도 총검에 찔려 사망하고 그것도 모자라 민가 31채에 불을 지르며 일제의 만행은 계속된다. 교회당에서 사망한 사람 22명 밖에서 6명 사망으로 총 28명이 학살을 당한 사건이다.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실제 교회가 있던 장소 

 

 

고주리 학살 사건 

 

그리고 이 아리타 일행은 제암리 옆 고주리로 향한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제암리 학살 사건이지만 제암리 바로 옆이 고주리에서도 그들은 똑같은 학살을 했던 것이다. 
 

 

 

 
고주리 주민들 대부분은 제암리 학살 사건을 듣고 대피를 했지만 만세운동 지도자 김흥렬 일가는 마을에 남아 있었다. 죄 없는 자신들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고주리에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주모자가 어디있는지를 묻자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나무를 쌓아 짚을 놓은 후 일가족 6명을 꽁꽁묶어서 칼로 찔러 살해 후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 중에 김주업이라는 분은 결혼한 지 3일 된 새신랑이었고 9살짜리 남자아이도 있었는데 새신랑 부인 한씨가 자신의 치마 속에 숨겨서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한씨는 신랑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온전히 지켜봤던 충격으로 결국 3일 뒤에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고주리 학살 사건이다. 
 

 

최소한의 절차를 무시하고 학살한 이 사건을 그들은 은폐를 한다. 그러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사진에 의해 제암리의 참상으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그는 제암리 학살 소식을 듣고 학살 3일 후 방문을 한다. 일본 경찰의 삼험한 눈을 피해 학살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스코필드에 의해 국제사회에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그들 마저 놀랄 정도로 무참히 자행된 학살에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의 은폐를 시도했지만 외국인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신성한 교회당에 학살 사건이 발생한 것에 대해 외국인 선교사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고 AP통신원 테일러가 취재를 해서 뉴욕타임즈에 보도가 된다. 
 
이 기사로 일본의 만행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결국 이렇게 세계에 알려지기게 되니 일본은 보여주기 식의 재판을 열었는데 학살 사건의 주범 아리타도시오 중위의 군사재판이 열리고 결론은 공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한다.
 
 
이 과정에서 부녀자도 2명이 사살되었는데 이것도  직무 수행상의 과실 로 치부하며 결국 무죄를 선고 받는다.

 

 

 

당시 최후의 목격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 (충격적 내용 포함 더보기 클릭시 주의) 

 

 (충격적 내용 포함 확인시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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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지붕이 털썩 내려앉고 

 송장 타는 냄새

쌀 타는 냄새

 

짐승 타는 냄새 

그 자리에 뛰어들어가 죽어야 할텐데 

아이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가서 들여다 보니

(재가 되어버린 남편)

 

 

1982년 9월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63년 만에 유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23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당시 학살 사건의 흔적들을 발굴했다.

 

발굴된 23위의 유해는 합동 장례식을 9월 29일에 치르고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옆에 제암리 희생자 23인의 순국 묘지들 만들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숨진 독립운동가의 아들 안동순 씨는 당시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비로 제암. 고주리 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 <두렁바위>를 제작한다.

 

 

일본의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 없이 오늘날까지 시간은 흘러왔고 그래서 더욱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제암리 고주리 학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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