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15회 후반,16회]
오늘의 탐사지: 영월, 단종 유배지
주제: 단종의 생애
출연자: 정유미
선녀들 영월 여행지 순서
1.선돌
2.청령포-청령포 안 유배지터 2달 머뭄-관음송
3.관풍헌 (홍수범람후 단종이 옮긴 유배지)-자규루
4.단종의 릉 (장릉)
5.단종역사관
6.창절사 (사육신 생육신 이야기)
영월 선돌
12살에 왕이 되고 17살에 사망한 단종 (초등학교5학년에 왕이 되서 고1 때 목숨을 잃은 셈이다.)
왕위를 노린 수양대군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비운의 왕 단종이 유배를 떠나던 길을 딸라 가며 단종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단종 아버지 죽음 (문종의 죽음)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 안평대군은 형(문종)이 너무나 똑똑하고 왕의 자질을 같춘 사람이라 언감생심 왕을 꿈도 꾸지 않았다. 문종은 무난히 왕이 되었지만 문종의 어머니(소현왕후)가 돌아가시자 어머니 3년 상으로 심신이 지쳐있는데 바로 할아버지 세종이 승하(1450년 2월 17일) 또 다시 연이어 3년 상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6년 상을 치르고 몸이 망가져 결국 돌아가시게 되는데 고명 대신들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한다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떠난다. 그 아들이 어린 단종이었다. 단종의 나이 12세 무렵이었다.
청령포
비극의 시작
아버지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이 되면서 수양대군, 안평대군에게 없었던 왕의 꿈이 꿈틀꿈틀. 주변세력도 수양파 안평파로 나뉘게 된다. 사실상 수양대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략가 한명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책사 한명회와 수양의 만남
한명회의 친한 친구가 '권람'이라고 있었다. 집안 좋은 명문 안동 권씨의 후손 권람과 한명회는 과거시험을 봤는데 권람은 붙고 한명회는 과거 시험에 계속 낙방하다가 겨우 말단 벼슬을 얻었지만 만족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 정세를 읽고 정보 수집에 나선 한명회는 수양대군으로 결정하고 권람에게 수양대군을 만날 수 있게 부탁한다.
수양대군과 친했던 권람은 한명회를 추천한다. 이들의 만남은 9개월이 지난 후에 이루어 진다. 한명회는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어린 단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황표정사
그 당시 문종의 유언대로 단종을 지킨다고 하면서 인사권 결재 서류가 올라오면 노란점으로 미리 표시해두면 그 이름을 낙점하고 그들이 채택되는 황표정사를 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은 대신들에게 있었던 셈이다.
계유정난이란?
황표정사를 빌미로 잡은 수양대군은 단종을 두고 김종서,황보인등이 국정농단을 한다고 하여 1453년 10월10일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이 직접 부하를 데리고 그 당시 실세였던 좌의정 김종서를 찾아간다. 한밤중에 김종서를 만나 편지를 읽어보라고 건낸 뒤 편지를 읽으려던 김종서의 머리를 철퇴로 내리친다. 그런데 안 죽었다. 사돈댁으로 피신한 김종서를 수양대군이 집요하게 찾아내 결국 죽인다. 김종서를 없앤 뒤 바로 궁궐로 들어와서 어명이라고 속이고 모든 반대파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 모으는데 대신들이 궁궐로 들어 서는 족족 모조리 숙청을 한다. 피의 밤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영의정에 오른 수양대군은 그때가 1453년 계유년이었는데 김종서,황보인 등이 난을 벌이려고 했다. 우리 왕족을 죽이려고 했던 그들의 난을 내가 (수양대군이) 정벌했다. 그것이 계유정난:계유년에 난을 정벌했다. 는 의미다. 수양과 한명회의 시나리오대로 역모죄 누명을 씌워 단종의 측근들을 몰살했고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의 1등 공신이 되어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수양은 친동생 안평대군을 유배 후 사약을 내리고 또 다른 동생 금성대군도 사약으로 죽인다.
이런 상황에서 단종은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 옥새를 건네받은 수양대군은 거부하는 척 하다 못 이기는 척 옥새를 품고 살금살금...
단종복위 운동
그러나 성삼문, 박팽년 충신들이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고 성산문은 단종을 찾아 계획을 알리고 단종은 그때 성산문에게 (동의의 표시로) 칼을 한 자루 준다. 이것이 나중에 성산문을 고문하는 중에 밝혀지고 2차 단종복위운동을 단종의 장인이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단종은 결국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단종의 죽음
기록마다 단종의 죽음이 모두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세조실록의 단종 죽음
단종의 또 다른 삼촌 금성대군은 어렸을 때부터 단종을 예뻐했다. 그런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단종복위운동을 벌인다. 그러다 발각되어 유배를 가지만 포기하지 않고 유배지에서도 단종복위운동을 한 금성대군은 결국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세조 시대의 기록이라 사실성이 떨어진다.
관풍헌
-후대에 쓰여진 숙종 실록의 죽음
사사하라는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들고 단종에게 향한 왕방연. 단종 대왕께서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우물쭈물했다. 그때 옆에 있던 공생(심부름꾼)이 (수많은 기록 중)
활시위를 이용해 단종의 목을 감아 당겨서 교살하고 공생은 문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모든 구멍으로 피를 토하며 사망했다.
-또 다른 비슷한 기록
밖에서 줄을 잡아당기라고 시킨 후 단종은 스스로 목에 줄을 감고 시종에게 당기라고 시킨 후 죽었다. 단종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설도 있다.
장릉
단종의 죽음 후
단종이 죽고나서 그 시신을 동강에 유기를 한다.영월주민들은 어린 왕의 최후가 가여워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는데 세조는 시신을 수습하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한다.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데 엄흥도라는 분이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다. 추운 겨울밤, 몰래 시신을 업고 어디에 묻을지를 찾다가 지금의 단종무덤) 높은데 까지 왔다. 온통 눈이 와 있어서 장소를 찾는데 노루 한마리가 앉아 있던 자리만 눈이 쌓이지 않아 그곳에 단종 무덤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조의 보복을 피해 숨어버린다.. 59년 후 중종 11년에 단종의 무덤을 찾으려 했다.
그맘때쯤 영월군수로 오는 사람마다 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영월군수 박충원의 꿈에 누군가에 이끌러 숲 속에 끌려갔는데 한 임금과 여섯 명의 신하가 있었다. 왕이 박충원을 처형하라고 하니 한 명의 신하가 극구 말렸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충원은 그 임금이 단종일 거라 생각하고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가 묻은 자리를 알아낸다. 그리고 단종의 무덤에 제를 지내고 나니 박충원은 무탈했다고 한다.
- 선조실록에 적혀있는 내용-
단종 역사관
그 이후 숙종 때 노산군->노산대군->단종으로 복권되고 능 이름을 장릉으로 했다. 정조 때는 단종을 기리기 위해 단종과 관련된 장소를 그림 월중도가 남아있다.
자규루 (자규=소쩍새)
▼사육신 생육신 위패가 있는 창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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