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 방송 리뷰/벌거벗은 세계사

아돌프 히틀러 이야기

by 365 ^^ 2021. 3. 5.
반응형

[벌거벗은 세계사 1회 리뷰]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국경의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히틀러의 원래 국적은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이다. 

 

오스트리아 히틀러 생가
어린시절 히틀러 모습

히틀러의 어린 시절

어릴 적 히틀러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학대를 받으면 자랐고 그런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틀러의 꿈을 묵살하고 실업 학교에 강제 입학시켰다. 

 

히틀러 그림 1
히틀러 그림 2

히틀러 청년시절

15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어머니도 돌아가신다. 미대에 입학 지원을 하지만 3번이나 떨어지면서 군 입대를 해야 했지만 몸이 약했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심신 미약으로 군대가 면제되면서 독일 시민이 되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로 넘어온다. 독일로 와서 제일 먼저 군 입대를 자원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했던 히틀러는 독일군의 일원으로써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가 속한 군대 병력수는 611명이였는데 전투에 참여해 349명이 전사하지만 히틀러는 살아 남았다. 이후 250명 중 225명이 전사하지만 여기서도 살아남은 히틀러는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의 탄생이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훈장을 받을 정도로 독일에서는 인정을 받게 되고 제대 후 청년 히틀러는 나치당의 전신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한다. 

실제 히틀러의 555번째 입당서

 

총통이 된 히틀러

이후 능력을 인정받은 히틀러는 1933년 당대표에 오르게 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되고 수상으로 임명된다.  그때 80세가 넘은 고령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마침내 그 자리까지 차지하면서 국무총리와 대통령을 합쳐 최고 지위의 총통이 된다. 히틀러의 총통이 되기까지 그의 연설이 큰 역할을 했다. 

 

 

 

 

 

히틀러의 연설 비법

히틀러는 연설에 재능이 있었다. 뮌헨의 맥주집에서 처음으로 100명의 관객들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고 4개월 뒤 대중을 매료시킨 히틀러의 연설을 듣기 위해 3000석이 마감된다. 

  • 큰 목소리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강한 단어를 사용 -ex) 유대인은 유럽에서 말살될 것입니다.
  • 대중을 선동하는 화려한 제스처를 사용
  • 무대 장치를 이용 (웅장한 배경음악 사용, 저녁시간 이용, 연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화려한 조명 사용 등)
  •  

히틀러식 인사 

☆ 현재 이런 제스처는 독일에서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되는 제스처이다. 법으로 금지된 것으로 공공장소에서 장난으로라도 따라 했을 시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게 된다. 

 

 

 

 

히틀러의 남자 요제프 괴벨스

히틀러는 연설에는 능력이 있었지만 홍보 마케팅 브랜딩 능력에는 탁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역할을 대신 수행한 선전부장이 바로 히틀러의 오른팔 요제프 괴벨스였다(1897~1945).

 

요제프 괴벨스

화려한 언변과 통찰력으로 나치당의 선전 장관에 발탁되어 히틀러의 최측근에서 히틀러 우상화 작업 및 애국심 고취에 힘썼고 다양한 선동술을 선보였다. 그중에 하나가 대중에게 싼 가격에 라디오를 보급해 대중 선전 선동에 적극 활동했다. 이렇게 라디오 보급의 확대로 독일 국민들은 빠르게 선동되고 세뇌당했다. 

 

 

히틀러의 연설은 왜 이렇게 효과가 있었을까?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경제는 정말 어려웠다. 191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으로 31개 연합국이 패전국인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면서 독일인들은 매우 살기 힘들어졌고 독일의 경제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선택한 히틀러가 국민은 선동하는 연설을 했던 것이다. 전쟁을 통해서 자원, 영토, 식민지를 다시 되찾고자 했다. 

 

 

 

 

히틀러는 집권 후 6년 동안 경제 발전에 힘을 썼고 그와 동시에 국방력을 증가시키며 전쟁 준비를 마쳤던 히틀러였다. 그렇게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히틀러의 여자 에바 브라운

에바 브라운은 당시 모델이었다. 나치당의 사진사 보조로 일을 하다가 히틀러와 사랑에 빠진다. 당시 히틀러와의 나이 차이는 23살이었고 당시 에바 브라운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녀는 히틀러의 숨겨진 애인으로 호화로운 삶을 누린다. 

 

에바 브라운 사진

아돌프 히틀러의 비밀벙커


관저에서 12M 아래에 위치해 있고 외벽의 두께가 4M 정도, 천장 콘크리트 두께게 2M였다. 최근 핵폭탄 대비용 벙커 두께는 기본 40 센티미터 정도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두꺼운 외벽인 것이다. 또한 집무실, 회의실 등에 비해 유독 큰 식당,부엌에는 케익이 있다. 

 

 

당시 콜라의 주요 소비국이 독일이었는데 2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미국에서 콜라 원료 수입이 막혀 1940년 콜라의 대용품으로 환타를 개발했다. 초반에는 환타가 검정색이었다. 

 

 

사실 히틀러는 권력을 찬탈한 권력자가 아니고 국민투표를 통해 당선된 권력자였기 때문에 전시에도독일 국민의 생활수준 유지에 신경을 많이 썻던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자살

소련군이 베를린은 점령한 후 일주일 뒤인 1945년 4월 29일 에바 브라운과 결혼 후 다음날 자신의 애견 블론디를 안락사시키고 에바 브라운에겐 청산가리를 먹이고 그리고 스스로 권총 자살을 하고 죽는다. 그가 남긴 18장 정도의 유서에는 적군에게 잡혀 항복하고 굴욕을 당하는 것이 치욕스럽고 두렵다 그래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각시켜 달라고 남긴다.  실제로 히틀러가 죽은 뒤 친위대가 히틀러 부부의 시신을 소각했다. 

 

히틀러의 마지막 흔적

그러나 그가 실제로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와 역사

 

홀로코스트 !!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와 역사

고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지금의 이스라엘에 정착해 살다가 2000년 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방(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와 팔레스타인 국의 구역) 밖으로 쫓겨난 후 2천 년 가까이

jangane.tistory.com

유대인 수용소 작센 하우젠

 

유대인 수용소 작센 하우젠

[선녀들 7회 후반 리뷰]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는 유대인 대량학살을 위해 독일과 점령지 전역에 수용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독일에 거주하던 90%의 유대인이 학살당했고 유대인 최대 거주지였

jangane.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