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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의자왕 삼천궁녀의 낙화암 이야기 in 구드래 나루터 선착장

by 짱신나^^ 2020.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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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9회]

 

오늘의 탐사지: 부여, 익산

주제: 백제 이야기   

 

출연자: 박찬호, 한선화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

'의자'의 뜻: 의로울 의 자애로울 자  

삼천 궁녀와 연관되어 문란한 왕이라고 기억되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이름처럼 의롭고 자애로웠던 왕이고 효자였고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중국에 효자로 이름난 사람 중에 '증자'라고 있다. 효의 대명사다. 그런데 의자왕의 별명이 '해동증자'였다.
 
해동증자- 바다 동쪽에 있는 증자와 같은 사람
 
의자왕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라고 불리었다. - 삼국사기 중-
 
554년 신라가 나제 동맹을 깨고 배신 한 후 백제는 많은 땅을 신라에 빼았겼다. 그 후 88년 후 642년 대신라전을 감행한다. 그때의 왕이 의자왕이다. 신라 40여 성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고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 대야성을 빼앗고 신라 김춘추의 사위,딸을 죽인 후 시신의 목을 잘라 백제의 천한 죄수들이 갖혀 있는 감옥 바닥에 묻어 버렸다. 이와 같이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연 왕이 의자왕이다. 
 

 

 
의자왕이 갑자기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7세기 중반 백제 멸망 4년 전부터 의자왕의 기록은 확 달라진다. <일본서기>중 의자왕이 은고라는 여자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 당나라 소정방이 쓴 비문에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망한 계집을 믿어..." 라는 구절이 있지만 그 계집이 은고라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자왕은 계백장군을 내보낸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하고 야반도주해서 공주(웅진성)에 숨는다. 그 와중에 사비성에선 아들들끼리 내분이 벌어진다. 결국 의자왕은 항복하고 개국 700여 년 만에 멸망한다. 결국 가족,신하,백성 만여 명과 함께 포로로 당나라로 끌려간다. 의자왕은 패망에 대한 화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죽은 시신은 옛 중국 수도 낙양에 묻혀졌다고 하지만  지금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구드래 나루터 선착장

 

 

 

※ 구드래 나루터 선착장은 금강 하류(백마강)에 위치해 있고 백제 시대 때는 일본과 중국의 배가 오가던 국제항이었다. 지금은 낙화암을 가기 위한 유람선이 출발하는 나루터이다. 

 

 

주소: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 72

운행시간: 7인이상시 상시출발 

선착장 전화번호: 041-835-4689

요금:7,000원 성인(왕복)  5,000원 성인(편도) 3,000원 소아(왕복)

 

 

금강의 일부를 백마강으로 부르게 된 전설은? 

금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하려던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강을 건너는데 용이 나타났다. 결국 당나라 대군들은 용을 잡기로 결심하고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먹이로 매달아 용을 유인해 용이 나타났을 때 밧줄로 용을 잡아 강을 건넜다. 백마로 용을 잡고 강을 건넜다 해서 그때부터 백마강으로 불리운다는 설이 있다. 
 

낙화암 유래 (낙화암과 삼천궁녀)
구드래 나루터 금강 하류 한켠에 위치했고 배를 타고 나아가다 보면 의자왕 삼천 궁녀 이야기로 유명한 낙화암이 보인다. 

 

 
백제 멸명 시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고 알려진 곳이 낙화암이다. 

 

 

그러나 삼천궁녀가 아니다?
삼천궁녀라고 하는것은 그 많은 인원을 세어보진 않았을 텐데 .. 알고보니 조선 시대 문인 민제인 시인이 백마강을 소개로 지은 <백마강부>에 보면 '삼천궁녀' 단어가 언급된다. 

 

삼천은 '많음'을 강조하려 사용한 표현이다.

 

낙화암은 수많은 백제인들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또 다른 출처는  성종 때 문신 '김흔'의  시 낙화암에 처음 등장하는데  '삼천가무'를  삼천궁녀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저널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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