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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송 리뷰

부마민주항쟁 (유신체제를 붕괴시킨 사건)

by 365 ^^ 2021.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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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4대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는 이 4가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유혈혁명이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부마 민주 항쟁만이 유일하게 사망자가 0명으로 기록을 하고 있었으나 2019년 고 유치준씨를 40년 만에 부마항쟁 사망자로 공식 인정했다.

 

 

부마 항쟁의 최초 사망자로 인정된 유치준

1979년 10월 18일 마산에서 유치준씨는 여느때 처럼 일을 나섰는데 당시 퇴근길에 시위가 격렬하게 발생했던 장소였다. 출근한다고 나간 유치진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 뒤인 11월 초 파출소에서 걸려 온 전화 “ 길에서 유치준 씨가 사망 한 것으로 보입니다”

 

 

파출소를 가보니 시신은 임으로 부검되었고 가매장된 상태였다.  당시 억압적인 분위기 속 급히 시신을 수습한 유가족은 이 일을 덮었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된 다음에 아들이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찾아나서기 시작하고 민주화 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추적하던 과정 중 양쪽에서 기록이 발견된다. 2019년 부마 민주 항쟁 40주년으로 유치준씨는 부마민주항쟁 사망자로 인정받은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이다.

 

 

부마 민주 항쟁 시작 배경

1979년 10월 16일 ~20일 전후로 부산 및 마산 지역(부.마)을 중심으로 벌어진 유신 독재 반대 시위 사건이다. 유신 독재 장기화로 쌓여간 국민들의 불만과 그 상황에서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까지 도래,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심각했던 당시 상황에 YH 무역 사건이 발생한다.

 

YH 무역 상사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부당한 대우와 폐업 조치에 반발해 신민당 당사에 가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 당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한다. (4층에서 떨어져 사망 1979년 8월 28일 장례식) 그리고 당시 야당 김영삼 총재가 유신독체의 폭력성을 격렬하게 규탄을 한다.

 

 

뉴욕 타임즈와 인터뷰하면서 미국의 박정희 정권 지지 철회를 요구하며 미국을 압박하는 강력한 정치 제스쳐를 보인다.

 

부산대 시위(1979년 10월 16일)

1979년 10월 16일 민주주의를 위한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마산대(경남대)와 부산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각각 준비한다.

 

 

부산대의 20명 정도의 학생이 나와 독재 타도를 외쳤는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며 고등학생, 회사원, 노동자까지 합세 5~7만 명이 거리로 나와 격렬하게 저항시위를 했다.

 

 

부산 계엄령 선포(10월 18일)

이 소식을 들은 마산에서도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틀 뒤 1979년 10월 18일 부산지역에 계엄령이 선포했다. 격렬한 저항에 군대를 투입하고 (무장군인, 장갑차 등 시내 점령) 부산대 앞에 계엄군을 주둔시키고 공수부대까지 투입한다. 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한독병원을 지나던 시민 전병진씨를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가  M16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이에 뇌에 문제가 생겨 뇌수술까지 받았던 일도 있었다. 

 

 

마산 위수령 발동(10월 20일)

마산에서도 부산과 똑같은 과정으로 전개되었고 1979년 10월 20일 위수령 선포 육군, 경찰, 해군까지 동원되었다. 실제로 이때 잡혀가서 시민이 3명이 군법회의를 받고 징역형을 받는다. 이들을 포함 총 10명의 시민이 41년만에  무죄 선고를 2020년에 받았다.

 

 

 

유신체제 종결

당시 청와대는 부마민주항쟁 진압 과정 회의 중 김재규가 진압 단계는 이미 넘어섰고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며 체제 유지를 하자고 건의했으나 그곳에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 부산, 마산 시민 100만 200만 희생시키는 것쯤 별 문제겠냐? “ 고 말하고 박정희가 차지철 편을 들어준 것이다.

 

 

결국은 부마민주항쟁의 격렬한 여파 속에서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두고 김재규와 차지철의 입장이 대립되면서 부마민주항쟁 (부산 마산 민주 항쟁) 진압 6일 뒤 1979년 10월 26일 두 발의 총성과 함께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것이다.

 

 

 

 

박정희 암살 10.26사태 이야기(10월유신,yh무역사건,부마민주항쟁)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66회 중]  주제: 10.26 사태 출연자: 설민석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961년 5월 16일~ 1979: 3,4 공화국) 1960년대 대한민국은 혼돈의 시기였다. 5.16 군사정변 그 당시 실세였던

jangane.tistory.com

 

부마민주항쟁 이후 

그러나 이후에도 군대 사조직 하나회의 수장이자 박정희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으로  대통령이 되면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면서 계엄군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 발포로 최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부마민주항쟁 의의

 

이전 4.19 혁명때도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를 투입했었으나 우리 역사에서 군대가 직접적으로 무장을 하고 들어와서 시민을 진압한 첫번째 사례가 부마 민주항쟁이 되면서 그 이후에 시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군대 투입을 하기 시작하면서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벌어진다.

 

 

부마 민주항쟁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고 거의 잊혀졌지만 부마 민주항쟁 통해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민주화 과정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던 중요한 사건이다.

 

 

[역사한방, 어쩌다 어른, 사피엔스 스튜디오 역사읽어드립니다. 1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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