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공산주의 확대를 막기 위해서 cia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비밀공작을 시작했고 그 1번째 국가가 바로 과테말라였다. 과테말라는 16세기 초부터 약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세기 초에 독립한 이후에 굉장히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고 백 년이 넘게 4명 정도의 독재자가 과테말라를 통치했다.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부 수립
1944 년에 과테말라의 독재 정권에 맞서는 대중의 대규모 저항 운동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1950년 민주 선거에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이라는 인물이 65.4%의 높은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래서 과테말라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로운 권력 계승으로 탄생한 아르벤스 정부였다.
미국을 자극하는 아르벤스 정부 정책
그러나 아르벤스 정부의 정책 방향이 미국을 자극했다. 아르벤스 정부는 가난에 처한 국민들을 위해 나라의 부를 나누겠다고 선언했고 취임 후에 각종 정책에서 가장 중점을 뒀던 것이 토지 개혁이었다. 1950년 과테말라에 인구는 약 350만 명으로 추정되고 그중에 약 2% 인구가 전체 경작지의 70% 이상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불평등 문제가 심각했고 이것을 정부가 수용해서 토지 재분배 정책을 추진한 정부였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문제는 아르벤스 정부가 추진하려는 토지 수용정책에 미국의 거대 기업인 united fruit 컴퍼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19세기 말 등장한 미국의 대형 과일 기업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생산한 바나나를 세계 시장에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긴 회사이다.
바나나 학살
1950년 과테말라에서 united fruit company 에 땅은 약 18만 헥타르였고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1/7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회사는 노동 착취가 심한 회사였기 때문에 인식이 좋지 않았고 '바나나 학살'이라는 일도 있었다. 노동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을 United fruit company와 콜롬비아 정부가 결탁하여 군대를 보내 노동자들을 총으로 탄압했다. 과테말라를 비롯한 여러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바나나 학살이었다.
그 당시에. United fruit company 에 권력은 막강하여 바나나 자본을 앞세워 철도, 항만, 유통 등 다양한 분야로 투자를 해서 사업을 확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과테말라를 일컫어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이에 아르벤스 정부는 유나이티드 푸르트 컴퍼니에 돈을 지불하고 땅을 사기로 했으나 보상금액이 성에 차지 않은 컴퍼니는 이를 거절하게 된다.
아르벤스 정부와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의 이런 분위기를 미국 정부도 심상치 않게 지켜보고 있었고 미국 정부는 아르벤스 정부의 이런 정책이 소련의 영향을 받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벤스 구스만 정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인물로 지목되고 미국 정부는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비밀공작을 시작한다.
cia 비밀공작 핵심인물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한 cia 에 비밀공작의 핵심인물은 미국인 고위 관리 3명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cia 국장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었다. 앨런 덜레스와 존 포스터 덜레스는 형제 관계였다. 심지어 유나이티드 푸르트 company 파트너 회사에서 덜레스 형제는 이사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유도 상당히 컸다고 볼 수 있다.
작전명: 피비석세스
이때 cia 는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뜨릴 쿠데타 주동자를 물색하는 것이었고 그가 바로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였다. 그는 아르벤스 정부에 반감이 깊었던 인물로 미국과 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CIA 비밀공작
CIA는 과테말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온두라스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작전기지를 세웠다. 아르마스는 CIA 도움으로 반군을 무장 훈련시켜 쿠데타를 성공시킬 작전을 세우게 된다. 아르마스의 반군은 약 오백 명 남짓으로 수적으로 약소했다.
이에 cia는 방송을 이용했다. 이때 CIA는 방송국을 만들어 과테말라로 송출 작전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cia 에 루머를 믿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방송을 하고 3주 뒤 민심을 흔들어 놓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54년 5월 24일 Cia 는 과테말라 정부군이 습격당한 것처럼 거짓 방송을 꾸며 과테말라인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이틀 뒤 재계된 방송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공격했다는 방송을 내보낸다.
이런 심리 작전의 결과 거짓 방송을 믿는 과테말라인이 늘어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많았던 과테말라인들을 선동하기 위해 대주교가 쓴 공산주의와 타락한 대통령을 반대한다는 글을 쓰게 해 국민들에게 퍼뜨리기도 했다. 이는 아르벤스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운동 및 반공 시위로 이어졌다.
아르벤스 정부는 쿠테타를 대비해 정부군을 보강하려 했으나 과테말라가 무기를 사지 못하게 금수조치를 취했던 미국으로 인해 미국의 영향권 밖인 공산주의 국가 체코에서 무기를 비밀리에 수입하게 된다. 그런데 CIA는 이 사실을 포착했고 이는 아르벤스가 공산주의 진영과 교류한다고 부각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과테말라 쿠데타 발생
1954년 6월 18일 CIA 지원 속 아르마스 군대가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쿠테타가 발생했고 그동안 온두라스에서 훈련시킨 반군들을 집합시킨 뒤 동시다발적으로 과테말라 침공을 시작했다. 아르벤스 정부는 쿠데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1954년 6월 27일 아르벤스 대통령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한다. 사임 후 대통령은 멕시코로 망명을 떠났다.
카스키오 아르마스는 군사평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고 공산주의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아르마스는 방공 국방위원회를 세워 인구의 약 1/10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아르벤스 정부의 개혁 정책 전면을 폐지했다.
CIA 공작 쿠데타 성공
아르마스는 미국의 대통령 승인 아래 무력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그 결과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땅과 자산을 과테말라에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cia의 지원을 받은 아르마스의 임기는 고작 3년에 그친다. 아르마스는 대통령 취임 3년 후 1950년 경호원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아르마스가 죽은 이후에도 과테말라에도 여러 정권이 들어서기는 하지만 대체로 군부정권이 들어섰고 군부 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국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1960년대부터는 과테말라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1980년대부터는 훨씬 참혹한 양상을 띠면서 약 36년간 내전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원주민 학살이 발생했고 최소 20만명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약 150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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